김훈의 소설 <남한 산성>은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다. 청은 병자년에 조선에 쳐들어온다. 침략의 명분은 황제의 나라 청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말이다. 형제들을 도륙하고 황제에 오른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는 십오만 대군을 조선에 보낸다. 군신관계를 수립하고 그에 걸맞은 조공을 받기 위함이다. 전쟁은 이를 이루기 위한 도구였다. 조선의 조정은 혼란에 빠진다.
청의 군대는 거침없이 내려와 조정을 압박한다. 너무도 빠른 움직임이다. 겨우내 얼어버린 강은 배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은 전란을 배경으로 하지만 전투보다는 조정의 갈등과 군신들의 심경을 밀도 있게 그려낸다. 척화를 주장하는 김상헌, 화친이 상책이라는 최명길 사이의 첨예한 말잔치에 작가는 공을 들인다.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김상헌과 그를 따르는 젊은 유생들은 사대의 명분을 내세운다. 하지만 최명길은 달랐다. 힘의 차이를 인정하고 현실론을 택한다. 인조는 화친과 척화 사이에서 갈등한다. 우유부단하고 유약한 인조의 모습은 힘없는 나라의 군주를 잘 대변해주는 듯하다. 갈 곳은 정묘호란 시 피신처였던 강화도였다. 하지만 이 번엔 달랐다. 청의 군대가 이미 김포에까지 내려왔기 때문이다. 인조의 선택은 남한산성이었다. 산성으로의 발걸음은 무거웠을 것이다. 죽음이 무겁듯이 굴욕도 무거웠을게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47일간 청의 군대와 대치했다. 남한산성으로 자리를 옮긴 조정에서는 동일한 말싸움이 재현되었다. 척화파의 김상헌과 주화파의 최명길, 그 둘은 각자의 명분으로 인조를 압박하고 설득했다. 상헌은 가벼운 죽음으로 삶을 지탱한다고 말한다. 명길은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할 수 없음을 말한다. 상헌은 죽음의 가벼움을 명길은 죽음의 무거움을 이야기한다. 상헌은 정신의 우월을 강조하며 오랑캐와 화친하느니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한다는 철학적 메시지를 던진다. 명길은 비록 굴욕적이지만 화친을 통해 백성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후일을 도모하자고 주장한다. 그는 힘의 무게추가 기울어 있는 현실에 천착한다. 그들에게 백성은 어떤 존재였을까?
굴욕은 사대부의 몫이지만 전란의 고통은 민초들의 몫이다. 성 안의 백성들의 삶은 남루했다. 성을 벗어나면 화포와 창을 든 청의 군사가 기다리고 있다. 성안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배고픔과 추위를 견뎌야 했고,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청의 홍이포에 대비해야 했다. 백성들은 공포의 나날을 견뎌야 했다. 민초들은 상황의 엄혹함과 남루함에 자중지란이 되었다. 청의 군대를 염탐하러 성 밖으로 나간 병사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죽었을 수도 있었고, 도주했을 수도 있었다. 알길은 없었다. 민초들 속에 대장장이 서날쇠의 등장은 독특하고 신선하다. 신분제 사회에서 천한 신분으로 그는 김상헌의 다양한 요청을 받아들인다. 묵묵히 무기를 만들고 전란의 상황을 지방 수령에게 전달하기 위한 전령사가 된다. 서날쇠에게 조선이라는 나라가 충성의 대상이 되기에는 너무도 멀지 않은가?. 소외된 천민 계급이 나라와 조정이 눈에 들어올까? 나라를 의식했다면 강요된 관성적 복종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과, 자신이 살아온 삶의 본능에 충실했다.
청의 홍의포 공격에 성벽은 무너지고, 조선의 군대는 유린당한다. 그리고 인조에겐 단 하나의 선택만이 남는다. 청의 황제 홍타이지 앞에 나아가 굻어 엎드려 이마를 찧는 일이었다. 호란의 결과는 참담했다. 수없이 많은 죄 없는 생명들이 사라졌고, 50만의 조선의 백성이 청나라 노예로 끌려갔다. 군신의 관계가 이루어졌고, 엄청난 조공을 받쳐야 했다. 삼전도의 굴욕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무력한 조선은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는 처참한 결과앞에 고개 숙여야 했다.
김훈의 소설에는 날이 서있다. <칼의 노래>에서 보여준 선명함과 날카로움이 <남한산성>에도 빛을 발한다. 작가가 차려낸 문학적 수사와 말의 성찬에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된다. 인간 내면의 갈등과 고뇌를 절제된 언어로 표현한 <남한산성>은 역사의 아픔뿐만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 무엇인지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김상헌의 말처럼 죽음은 정말 가벼운가? 아니면 최명길의 주장처럼 죽음은 무겁고 삶은 가벼운가?
<책 속으로>
그해 겨울 갈 수 없는 길과 가야 하는 길은 포개져 있었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임금은 삼전도에서 항복했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받아들였다.
조선은 청의 신하가 되었고 주권은 능욕 당했다. 치욕은 크고 깊었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어야 하는 것이 삶의 길이라면 견딜 수 없는 것은 없는 것인가.
_ 못다 한 말에서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임금의 몸에 치욕이 닥치는 날에, 신하는 임금을 막아선 채 죽고 임금은 종묘의 위폐를 끌어안고 죽어도, 들에는 백성들이 살아남아서
사직을 회복할 것이라는 말은 크고 높았다. _15쪽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으로 삶을 열어나가는 것이다. 아침이 오고 또 봄이 오듯이 새로운 시간과
더불어 새로워지지 못한다면, 이 성안에서 세상은 끝날 것이고 끝나는 날까지 고통을 다 바쳐야 할 것이지만, 아침은 오고 봄은 기어이 오는 것이어서 성 밖에서 성안으로 들어왔듯 성안에서 성 밖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이 어찌 없다 하겠느냐..... _71쪽
전하, 죽음이 가볍지 어찌 삶이 가볍겠습니까 명길이 말하는 생이란 곧 죽음입니다.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살을 욕되게 하는 자이 옵니다. 신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전하, 죽음은 가볍지 안 사 옵니다. 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소서.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_160쪽
